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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서장 | 불곡 감실불상 | 옥룡암 탑골 마애조상군 | 보리사 | 나정 | 탑동 김헌용고가 | 창림사지 |
포석정 | 지마왕릉

상서장(上書莊)

경상북도 기념물 제46호로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최치원의 집터로 추정하고 있다. 남산의 왕정골 남쪽에 위치해 있는 상서장은 최치원이 신라왕에게 시무책(時務策)을 올린데서 붙여진 명칭으로 생각된다. 이 곳에는 영정각,상서장,추모문 등이 세워져 있고, 조선 고종 때 건립된 비가 남아 있다.  

이들 건물이 무너졌던 것을 근세에 후손들이 다시 세워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영정각에는 최치원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는데 밑계단에는 신라 때 건물초석으로 보이는 주춧돌 두 개가 남아 있다. 최치원은 신라말의 유학자로 《최문창후전집(崔文昌侯全集)》이라는 문집이 남아 있는 대문호(大文豪)이다. 그는 문성왕 19년(857)에 왕경(경주)의 사량부(沙梁部)에서 태어나 12세에 당나라에 들어가 18세인 874년에 빈공과(賓貢科,외국인들이 보는 과거시험)에 급제하였다. 그 후 당의 선주(宣州) 율수현위(水縣尉)를 거쳐 황소의 난을 맞아 당의 병마도통 고병(高騈)의 종사관으로 있다가, 885년에 신라로 돌아와 헌강왕으로부터 <시독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를 제수받았다. 이후 신라의 문병(文柄)을 장악하면서 많은 저술을 남겨 놓았다

불곡 감실불상(佛谷 巾室菩薩坐像)

남산(南山) 동쪽 기슭인 불곡(佛谷)의 한 바위에다 깊이가 1m나 되는 감실(龕室)을 파고 거기에 불상을 새긴 마애불(磨崖佛)이 있다. 주위에 흩어진 기와와 바위의 가구(架構) 흔적으로 보아 목조 전실(木造前室)이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며, 따라서 중국에서 유행하던 마애석굴(磨崖石窟)이라 할 수 있다.

불상의 머리는 두건을 덮어 쓴 것 같은데, 이것은 귀까지 덮고 있다. 후대의 나한상(羅漢像)에서 보는 것과 유사하지만 얕은 육계라든지 부드러운 굴곡 등은 그것들과 큰 차이가 있다   

얼굴은 둥글고 약간 이마를 숙였는데 알맞은 양감에 도드라진 눈, 깊이 판 입가 등으로 고졸하고 내면적인 미소가 만면에 번지고 있다. 모든 점에서 인왕동(仁旺洞) 석불좌상과 유사하지만, 이 불상은 확실히 여성적이며, 그래서 보살적인 인상이 짙다. 여기 부은 듯한 눈은 장창곡삼존불(長倉谷三尊佛) 등 고식 불상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삼도(三道) 없는 목도 마찬가지이다.

어깨는 반듯하지만 우아하며, 비록 옷에 싸였으나 몸의 율동감이 제법 여실하다. 여기에 손을 소매 속에 넣고 있어서 전체적인 자세가 아름답고 공손스런 여성의 그것으로 변해 있다. 무릎은 낮고 수평적인데다 오른발이 유난히 크다. 이런 비사실적인 수법은 공손한 자세와 더불어 고격을 더해 주는 것도 사실이다. 오른쪽 어깨와 왼쪽 무릎이 깨어진 외에는 완전한 불상이다.

통견(通肩)의 법의(法衣)는 묵직하게 처리되어 있지만, 신체의 굴곡을 감출 만큼 투박스럽지는 않다. 의문(衣文)은 선조(線彫)이며 가슴 양쪽의 굵직한 철선은 특징적이다. 무릎에서 내려오는 의문은 상현좌(裳懸座)를 만들고 있는데, 2단으로 된 옷주름은 비록 짤막하긴 하여도 유려하게 흐르고 있다. 광배(光背)는 따로 마련되지 않았다.

옥룡암 탑골 마애조상군(塔谷 磨魚磨崖彫像群)

이 곳은 신라 시대에 신인사(神印寺)란 절이 있었던 곳으로,남쪽에 3층 석탑이 있어 '탑곡(塔谷)이라 부른다. 그리고 마애조상군은 경주 남산의 동북쪽에 위치한 높이 약 10미터, 사방 폭 약 30미터의 암벽과 주변의 바위면에 여러 산이 새겨져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북쪽면에는 마주 선 7층 목탑과 9층 목탑 사이에 석가여래가 연꽃위에 앉아있는 모습이 새겨져있고 탑 앞에는 사자 두마리가 새겨져있다

동쪽면에는 가운데 여래상이 새겨져있고, 주위에는 비천상, 승려상, 보살상, 인왕상, 나무 등이 새겨져 있다.

남쪽면에는 삼존불이 정답게 새겨져있고 그 옆에는 여래상과 승려상이 새겨져 있다.

서쪽면에는 능수버들과 대나무 사이에 여래조상이 새겨져 있다. 

이와같이 여러상이 한자리에 새겨진 일은 보기드문 일이며, 지금까지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총 34점의 도상이 확인되고 있다

보리사마애석불(菩提寺磨崖石佛)

경주 남산의 보리사 석불좌상이 있는 곳에서 앞쪽으로 오솔길을 따라 산비탈로 35m쯤 가면 경사가 급한 산 허리에 높이 2m,밑넓이 2.3m의 암벽면에 여래좌상이 새겨져 있다. 넓직한 연꽃 위에 단정히 앉아 미소를 띤 여래상으로, 높은 돋을 새김으로 풍만한 느낌을 주고 있다. 특히 바위면을 안으로 경사지게하여 마애불이 외부의 손상을 입지 않게 하였다.

나정(蘿井)

사적 제245호로 경주시 탑동에 있는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탄강전설(誕降傳說)이 깃든 우물이다. 오릉(五陵)에서 남동쪽으로 약 1㎞쯤 떨어진 소나무숲 속 조그만 시조유허비(始組遺墟碑) 옆에 이 우물이 있다.

《삼국사기》권1 혁거세거서간(赫居世居西干)조에는 이에 관한 기록이 있다.   

옛날 진한(辰韓)의 땅에 일찍이 여섯 마을이 있었는데, 하나는 알천 양산촌(閼川楊山村), 둘은 돌산 고허촌(突山高虛村), 셋은 무산 대수촌(茂山大樹村), 넷은 취산 진지촌(嘴山珍支村) 다섯은 금산 가리촌(金山加利村), 여섯은 명활산 고야촌(明活山高耶村)으로, 그 마을 촌장의 이름은 각기 알평(謁平), 소 벌도리(蘇伐都利), 구례마(仇禮馬), 지백호(智伯虎), 지타(祗陀), 호진(虎珍) 등이었다. 어느날,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 밑 나정우물 곁에 있는 숲 사이를 바라보니 이상한 빛이 하늘로부터 드리웠는데, 그 빛 속에 흰 한말마리가 무릎을 꿇고 울고 있으므로 그곳으로 찾아가 보니, 그 말은 간 곳이 없고 다만 불그스름한 큰 알이 있을 뿐이었다. 그 알을 이상히 여겨 깨어보니, 그 알 속에는 신기하게도 아름답고 풍후한 한 어린 사내 아이가 들어 있었다. 이 사내아이가 후에 신라의 시조가 된 박혁거세이다. 알에서 나왔다하여 성을 박이라 하고, 빛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으로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 하였다 한다. 

탑동 김헌용고가(慶州塔洞金憲容古家屋)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김호의 고택(故宅)이라고 가전(家傳)되어 오는데 적어도 400년은 되었을 것이라고 후손들은 주장하고 있다. 이 댁은 경주의 남산 서록(西麓), 오릉(五陵)에서 들어가는 어귀에 위치한 마을의 끝에 자리잡았는데 신라시대의 절터였다는 설이 있다. 빈터에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초석(礎石) 등 석조물(石造物)들이 흩어져 있는데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우물돌도 있다. 또 삼국시대 초기의 연화(蓮華)무늬 수막새도 수습되고 있다.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될 당시엔 토담 밖에 없었던 것을 그 후에 남쪽편으로 솟을삼문형(三門形) 대문을 세웠는데 그 담장의 신조(新造)와 함께 안채와는 어울리지 않게 되었다. 지정조사시(指定調査時)의 대상은 맞배지붕의 안채와 초가집인 뜰 아래의 아래채 및 안채, 동북쪽에 있는 가묘(家廟)였다. 안채의 평면은 一자형의 외줄박이 홑집이다. 정면 좌측부터 부엌[한칸반(一間半)], 방, 고방, 방(각 1칸)으로 통칭 3칸 집이라 부르는 그런 유형이다. 3칸 집에서는 부엌은 통상 제외하는 것이어서 이런 4칸반 집도 3칸 집이라 범칭되는 것이다. 각 칸의 주칸(柱間)은 같으나 건넌방만은 약간 좁아졌다. 건넌방은 다른 칸에 비하여 하방(下枋)의 높이도 높다. 그리고 동측면에 작은 문짝을 달았다. 나지막한 뒷동산을 뒤에 두고 있는 터전은 북고남경(北高南傾)의 사면(斜面)을 이루고 있어서 안채의 뒤쪽 댓돌은 외벌대이고 앞쪽은 세벌대의 높이로 만들어야 하였다. 산석(山石)을 주초(柱礎)로 하여 방주(方柱)를 세웠다. 기둥머리엔 민도리를 얹었고 장혀는 없으나 문이 달리는 부분에서는 문인방을 두어서 장혀를 대신할 수 있게 하였다. 기둥에 벽선을 세우기도 하였으나 앞퇴도 쪽마루도 없이 보석(步石, 섬돌)을 딛고 바로 방문을 열고 들어서게 된다. 고방과 건넌방도 마찬가지이다. 저상식(低床式)의 구조만이 아직 고수되고 있는 원초형(原初形)이라 할 수 있으나 고방(庫房)을 판상(板床)하여서 구조상 고상형(高床形)과 절충됨이 있음을 보인다. 이 집에서 주목할 점은 처리한 기법들이 고식(古式)이라는 점과 고방(庫房) 앞에 문짝을 달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아래채 굴뚝이 부엌의 부뚜막에 있다는 남방식 요소의 특징과 함께 이 집을 지정하게된 학술적인 가치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상청(上廳)에 문짝을 다는 예는 안동(安東)지방 북쪽에서는 드물게 발견된다. 안동군 녹전면 일대가 북방의 한계선인듯이 보이는데 이런 집들은 경주 일대에 집중 분포되어 있다. 그런 집들 중에서 고식(古式)을 보이는 유례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 일대의 기와집은 대략 삼량가(三樑架)의 맞배집이다. 맞배집의 박공은 각각의 특색을 지녀 묘미가 넘치는데 이 집은 그 중에서도 고식이란데 가치가 있다. 아래채는 소박한 초가(草家)로 동향하였고 부엌은 북단에 있다. 칸반(間半) 크기이고 다음이 방, 또 방이고 남단이 우물마루 대청이다. 대청은 방에 면한 부분 외에는 세방향이 개방되었다. 일종의 내루(內褸)와 같은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초가(草家)의 질박한 구조인 점은 다른 집과 다를 바 없으나 방에 불을 지핀 연기가 빠지는 굴뚝이 부엌 부뚜막의 서쪽 끝에 시설되어 있다. 이런 구조는 남해(南海)의 사량도(蛇梁島) 등에서도 볼 수 있는 유형이다. 지방에서는 많은 불을 때어야 하므로 아궁이의 반대편에 굴뚝을 단단히 세워야 하였으나 남쪽에서는 약간의 불기만으로 만족되었으므로 이런 시설을 하고 대신 숙화용(宿火用)의 시설을 거기에 하여서 이중의 효과를 얻으려 하였다.

창림사지(昌林寺址)

《삼국유사》권1 신라 시조 혁거세왕조에 의하면, 원래 이 곳에는 박혁거세가 최초로 건립한 금성이라는 왕궁이 있었다고 전한다. 지금 이 곳에는 삼층석탑과 쌍두귀부, 주춧돌 등이 남아 있으며, 비석 대석과 석등 하대석, 비로자나불, 석탑 면석 등은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이 가운데 삼층석탑은 높이 6.5m로 남산 일대에서는 가장 크고 아름다운 석탑으로 알려져 있다. 

쌍두귀부는 비록 비신은 없어졌지만 귀부 머리는 수습이 되었는데, 신라의 3대 귀부로 손꼽힌다. 《신증동국여지승람》경주부조에 의하면, 원(元)나라 학사(學士) 조자앙(趙子昻)이 창림사비(昌林寺碑) 발문(跋文)에 "이것은 당(唐)나라 신라 승 김생(金生)이 쓴 그 나라의 창림사비(昌林寺碑)인데 자획(字 )이 깊고 법도가 있어 비록 당사자의 이름난 조각자(彫刻者)라도 그보다 썩 나을 수는 없었다. 옛말에, '어느 곳엔들 재주 있는 사람이 나지 않으랴.' 하였더니 진실로 그러하구나," 하였다고 전한다.

조선 순조 24년(1824)에는 창림사탑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머리부분과 동판에 새긴 <무구정탑원기>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무구정탑원기>는 855년에 국왕인 경응(慶膺,문성왕)이 현세와 내세에서의 공덕을 쌓기 위하여 탑을 건립하였다는 내용으로, 한림랑 김입지(翰林郞 金立之)가 글을 지었고 탑지의 글씨는 왕희지의 글씨를 모아서 새긴 것으로, 김입지의 <성주사사적비>와 김육진이 찬한 <무장사아미타여래조상사적비>도 같은 방법으로 되어 있어 당시의 한 경향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창림사탑은 양식상 8세기 후반의 것이고 또 1층 탑신석에 마련한 사리공의 크기도 이 원기와 맞지 않아 창림사의 또다른 탑에서 나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포석정지(鮑石亭址)

포석정지는 경주 남산 서쪽 계곡의 포석계의 계곡가에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처용랑 망해사조에 보면 「헌강왕(875-886)이 포석정(鮑石亭)에 놀러나와 남산신(南山神)의 춤을 보고 왕이 따라 추었는데 이 춤을 어무상심(御舞祥審) 또는 어무산신(御舞山神)이라 했다」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경애왕 4년(927) 11월에 왕이 포석정에 나가서 잔치를 하고 놀다가 후백제 견훤(甄萱)의 기습을 받아 왕은 죽고 왕비와 신하들이 모두 함몰되는 비극의 기사가 실려 있다. 

 포석정지는 신라의 이궁(離宮)에 있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하던 유배거(流盃渠)의 유적이다. 유상곡수연의 시초는 중국 동진시대(東晉時代)까지 올라간다. 영화(永和) 9년(353) 3월 3일에 중국 절강성(浙江省) 남서에 있는 회계산(會稽山) 북쪽 난정(蘭亭)에 왕희지(王羲之)등 41인의 명사들이 모여 흐르는 개울에 몸을 깨끗이 씻고 결제사를 올리고 개울 위에 술잔을 띄우고 술잔이 자기 앞에 올때까지 시 한수를 지어 읊는 놀이를 하였다. 이때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 3잔을 마시었다. 이 시회의 서문이 유명한 왕희지의 난정서(蘭亭序)이다. 이런 고사를 본따서 동양의 왕궁에는 유상곡수연의 유배거(流盃渠)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유배거(流盃渠)는 북경(北京)의 고궁에도 있고 일본 나라시 평성궁(平城宮) 유적에도 있다.

지마왕릉(祗磨王陵)

경주시 배동의 포석정 남쪽 200m지점에 위치하며 사적 제221호이다. 무덤의 지름은 12미터, 높이 3.4미터이다. 왕릉은 경사진 지형을 이용하여 일단 높은 곳에 만들고, 외부모습은 흙으로 덮은 둥근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서 겉으로는 아무 표식물이 없는 단순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능 앞에 놓여 있는 잘 다듬은 돌은 최근에 설치한 것으로 영혼이 나와 놀게 하기 위하여  

설치한다는 혼유석(魂遊石)이다.  이 무덤은 남산 서북쪽에 분포하는 무덤 가운데 가장 특징이 없고,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경주평지에 있는 고분과는 다른 입지조건이다. 이것은 2세기경에 속하는 무덤으로는 볼 수 없어 지마왕릉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