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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오능 | 알영정 | 숭덕전 | 홍륜사지 | 천관사지

신라오능(新羅五陵)

사적 제172호로 사릉(蛇陵)이라고도 하며, 경주시 탑동에 소재하고 있다. 경주 IC를 통과한 후 서라벌대로를 따라 이동하다가 삼거리에서 시내방향으로 좌회전하여 금성로로 접어들면 오른쪽에 울창한 송림이 시야에 들어오는데 그곳 가운데 오릉이다. 모두 박씨 왕의 능묘로서 5기가 전해오는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시조인 혁거세 . 왕비인 알영부인 . 제2대 남해차차웅 .  

제3대 유리니사금. 제5대 파사니사금 등의 능묘(陵墓)로 전해온다. 그러나 오릉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삼국유사}에 실려 있다.

"박혁거세가 나라를 다스린지 61년만에 하늘로 올라 갔다. 그후 7일만에 그 유체(遺體)가 알영정 부근에 떨어졌는데 사지(四肢)가 다섯으로 나뉘어 흩어져 있었다. 나라 사람들이 혁거세의 시신을 한데 모아서 장사지내려 하니 큰 뱀이 나타나서 이를 방해하였으므로 사지가 흩어져 있는대로 그 자리에 장사를 지내서 오릉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사변(蛇變)으로 오릉이 되었다' 하여 이 능역(陵域)을 사릉원(蛇陵園)이라 부르기도 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전혀 다른 내용으로 오릉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오릉은 {삼국사기}의 기록을 대체로 인정하여 따르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오릉이 갖고 있는 문제점은 다음의 내용들이다. 오릉의 전체적인 외형은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제 1릉은 가장 남쪽에 있으며 높이는 약 10미터로 5기 가운데 가장 높고 크다. 제2릉은 제1릉의 동북쪽에 있으며 높이는 약 9미터이다.

알영정(閼英井)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거서간 5년에 용이 이 우물에서 나타나, 오른쪽 갈비에서 여아를 낳았다. 한 노파가 보고 이상하게 여겨 거두어 양육하고 우물의 이름을 이름으로 삼았었다. 장성하자 덕이 있고 용모가 아름다왔다. 시조가 들여 왕비로 삼으니 어진 행실이 있어서 능히 내조를 하였으며, 그 때 사람들이 두 성인이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현재 알영정터는 오릉 내의 숭덕전 윗편으로 추정되고 있다.

숭덕전(崇德殿,朴赫居世王 祠堂)

경주시 오릉의 남쪽에 있는데, 신라 시조 박혁거세왕을 봉사하는 제전이다. 조선 세종 11년(1429)에 건립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 33년(1600)에 중건하였고 숙종 20년(1694)에 다시 수리하였다. 전(殿) 앞에는 영조 35년(1759)에 건립된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경종 3년(1723)에 묘호(廟號)를 숭덕전으로 고치고, 참봉 3인을 두어 봉수(奉修)하였다고 전한다. 주위에는 석등재. 석조, 당간지주 등이 있다.

홍륜사지(興輪寺址)

흥륜사는 신라 최초의 사찰로 칠처 가람터의 하나인 천경림을 베어내고 이차돈 사건을 겪으면서 창건한 사찰로 법흥,진흥왕과 밀접한 관계에 있던 사찰이었다. 법흥왕은 불법을 처음으로 공인한 불법조흥(佛法肇興)의 왕이라는 의미의 법흥이라 하였고, 법명도 법공(法空)이라고 하였다. 진흥왕 5년(544)에 사찰이 완성되자 왕은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라고 사액하였다. 진흥왕의 이름으로 나오는 삼맥종(三麥蠢),심맥부(深麥枇)는 사미의 상사음에서 따서 붙인 것으로 보고 있으며(김철준,p.91), 그의 법명은 법운(法雲)이었다. 법흥왕과 진흥왕은 모두 만년에 흥륜사에 단기출가라 할 수 있는 사신(捨身)을 하였던 것으로 보아 왕실의 원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진흥왕은 자신을 전륜성왕에 비유하듯이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을 동륜과 금륜(사륜)으로 짓기도 하였다. 또한 진흥왕은 흥륜사의 준공을 기념하여 이 해 3월부터 신라인들에게 출가하여 승니가 되어 부처를 받드는 것을 허락하였다.

흥륜사는 현재 사정동에 비구니스님들이 재건하여 거주하고 있는데 그 위치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즉, 미추왕능 동쪽에 위치하였다는 기록과 현재의 흥륜사 경내에서 '靈廟之寺'(김태중소장), '大令妙寺造瓦'(경주국립박물관소장)의 명문 기와가 출토되어 그 위치가 영묘사였을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의 흥륜사가 위치해 있는 곳이 흥륜들로 불려 온 것으로 보아서는 현재의 위치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는 형편이다. 곧 발굴을 한다하므로 그 귀추가 주목된다.

천관사지(天官寺址)

천관사는 현재 경주시 내남면 일남리,오릉의 숭덕전 맞은편에서 100m가량 마을 안으로 들어 가면 논 가운데에 탑의 가단부와 몇 개의 옥개석이 방치되어 있는 폐사지이다.《삼국유사》권41 김유신전에는 전하지 않고 있지만 인구에 회자된 것이 매우 오래되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경주부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있다. 김유신(金庾信)이 소시(少時)에 모부인(母夫人)이 날마다 엄한 훈계를하여 함부로 남과 사귀어 놀지 않더니, 하루는 우연히 계집 종의 집에서 유숙하였다. 어머니가 교훈하시기를, "나는 이미 늙었다. 낮이나 밤이나 네가 성장(成長)하여 공명(功名)을 세우고 임금과 어버이를 영화롭게 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제 네가 천(賤)한 아이들과 더불어 음탕한 방과 술집에서 놀아 작란하단 말이냐." 하고, 울음을 그치지 아니하니, 유신이 즉시 어머니의 앞에서 다시는 그 집문을 지나지 아니하니, 유신이 즉시 어머니의 앞에서 다시는 그 집앞을 지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하루는 술이 취하여 집에 돌아오는데 말이 전일에 다니던 길을 따라 그릇 창녀(娼女)의 집에 이르렀다. 창녀가 한편으로 반기고 한편으로 원망하여 울면서 나와 맞이하였다. 유신이 이미 깨닫고는 타고 온 말을 베이고 안장을 버린채 돌아갔다. 그 여자가 원망하는 노래 한 곡조를 지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절은 바로 그 여자의 집이며, 천관(天官)은 그 여자의 이름이다. 즉 천관이 <원사(怨詞)>라는 노래를 짓고 이 곳에서 목매어 죽었는데, 뒷 날 김유신이 천관을 위해 이 자리에 절을 세워 천관사라 이름하고, 말의 목을 베인 자리를 참마항(斬馬巷)이라고 불렀다 한다. 이 곳에서 8-9세기 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83cm 넓이 92cm의 사천왕상이 부조된 석탑 면석이 남아 있고, 연당초무늬 암막새와 <습비(習比)>명(銘)의 원아(圓瓦)가 수습되어 전하고 있다.

고려 이공승(李公升)이 지은 시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절 이름 천관(天官)은 옛 사연이 있는데, 홀연히 그 유래를 들으니 처연하다. 정 많은 공자가 꽃 아래에 놀았더니, 원망을 품은 가인(佳人)이 말 앞에 울었네. 말은 유정도하여 도리어 옛 길을 알았는데, 하인은 무슨 죄로 부질없이 채찍을 더했던고. 다만 남은 한 곡조의 가사가 묘하여, 섬토(蟾兎)가 함께 잔다는 말 만고에 전하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