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 경주관광안내 > 경주시내지역 

반월성 | 침성대 | 안압지 | 분황사 | 황룡사지 | 계림

반월성(慶州 月城)

사적 제16호로 지정되어 있는 둘레가 2,400의 신라시대 도성(都城)으로, 경주시 인왕동에 있다. 이 성은 그 형태가 반달과 같다하여 반월성(半月城)이라고도 하고, 왕이 계신 곳이라 하여 재성(在城)이라고도 하는데, 남산을 휘돌은 문천(蚊川)이 막다달아 그 지형이 꺾이면서 반월형을 만들어 낸 곳이다.

원래 석탈해왕이 기지를 써서 호공(瓠公)으로부터 빼앗은 집터로서, 그의 능도 함께 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성은 낮은 언덕 위를 깎아 평평하게 하고 강을 바라보는 남쪽 이외의 부분에 흙을 쌓아 올려 토성을 만든 것이므로, 성안이 넓고 자연경관이 좋아 궁성으로서의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또한 낭산(狼山)의 산정(山頂)과 금오산(金鰲山) 산정으로부터 서북 30의 방위에 위치하여 영산(靈山)의 정기(精氣)를 집중시킨 곳으로, 십이지연기(十二支緣起)가운데 생연기(生緣起)의 방향이라서 생식(生殖)과 번영(繁榮) 등을 상징하는 길지(吉地)이다.

월성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파사왕 22년(101)에 1423보의 둘레로 쌓은 기록이 있고, 유례왕 7년(290)에 큰 홍수로 성이 무너졌고, 소지왕이 9년(487)에 수리하여 이듬해인 488년에 이거한 기록이 있다. 따라서 왕이 거처했던 궁실로 추정되어 왔으나, 성동동의 전랑지 유적이나 황룡사가 원래 궁실로 지은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왕성의 외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새로이 국토가 확장되고 국력이 융성해지면서 구왕궁으로 추정되는 성동동 전랑지로서는 그 규모가 통일국가의 왕성으로 적합치 못하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왕성을 건조하게 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즉 고대 시기에 동북아 여러나라의 수도가 각기 연산 산정으로부터 서북 30°되는 방위선에 위치하고 있어, 신라 역시 이 곳에 왕성을 계획하고 석탈해의 능과 집을 토함산록으로 옮기고 그를 동악신으로 우대하면서 이 곳 반월성에 새로 왕궁을 건조하게 되었던 것으로 본 것이다.

첨성대(瞻星臺)

국보 제31호로 경주시 인왕동에 있다. 신라 선덕여왕 때 조영된 관측대이다. 사각형의 2중기단을 쌓고 지름이 일정하지 않은 원주형으로 돌려 27단을 쌓아 올렸우며 꼭대기에는 우물 정자(井字) 모양으로 돌을 엮어 놓았다. 각 석단의 높이는 약 30c이고, 13단과 15단의 중간에 남쪽으로 네모난 창을 내었는데 그 아래로 사다리 를 걸쳤던 흔적이 남아 있어 이를 통해 관측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창구 높이까지 흙이 메워져 있다.

1962년 12월 당시 경주박물관 관장 홍사준과 정영호 등이 확인한 바에 의하면, 1-27단까지의 벽돌수가 362개(지금은 반 개가 없어져 361개 반) 기단돌은 12개이고, 지댓돌 8개, 상부정자석 8개, 중간정자석 8개, 남측 문주 2개 27단의 판석 1개가 조사되어 전체 401개의 돌로 지어졌음이 알려졌다. 돌층 수는 28층으로 일종의 달력탑으로 보는데,기단넓이 5.18, 밑지름 4.93, 정상지름 3.03m, 높이 9.1의 천문관측대이다.

조선초 김시습이 이 곳에 와서 보고 그 모습을 읊어 놓았다. <問瞻星臺> 높은 대가 드높아서 하늘까지 닿았으니/역력한 천문을 한 눈으로 살피겠네./이것은 우러러 보고 덕을 닦는 기구인데/어찌하여 힘쓰기를 옛 성 곁에 있게 했나.(《매월당집》권12 <遊金鰲錄>) 첨성대 옆으로 차길이 나 있는데, 최근에 차들의 진동으로 대가 기울었다고 하는 문제가 제기돼 현재 차량통행을 금지시키고 있다 

안압지(慶州 臨海殿址)

경주시 인왕동 26번지에 위치한 안압지는 일명 월지(月池)라고도 부르는데,반월성의 동북방 국립경주박물관의 맞은편에 위치해 있다. 창건연대는 신라 문무왕 14년(674) 2월부터 19년(679) 8월까지 걸린 것으로 보고 있다.(《삼국사기》권7 문무왕 14년,19년조) 이 곳에는 동궁관, 동궁아, 세택, 월지전, 승방전, 월지악전 등의 건물이 있어 신라 왕들은 종종 군신을 모아 놓고 이 곳에서 향연을 베풀고 있다.  

주건물인 동궁(東宮)안에는 돌을 쌓고 산을 만들어 무산12봉(巫山十二峯:중국 사천성의 동쪽에 있는 名山으로 산위에 十二峯이 있음)을 본떴으며, 또 못을 만들어 못 가운데 세 개의 섬(蓬萊, 方丈, 瀛州 등 옛 전설 속의 海中仙山을 상징함)을 만들어 꽃나무를 심고 진기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는 기록도 있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동궁 안의 연못은 단순히 못이 아닌 바다로 상징되었다고 보여지며, 따라서 임해전이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 같다.

조선시대의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안압지는 천주사(天柱寺) 북쪽에 있으며, 그 서쪽에 임해전(臨海殿)의 터가 있는데, 주추와 섬돌이 밭이랑 사이에 남아 있다고 하므로 이미 폐허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터는 일제 때 철도가 지나가많은 훼손이 있었는데, 이 때 일부가 발굴조사되어 석조수구(石造水構)의 일부가 노출되었고, 화려한 보상화문전(寶相華文塼)을 비롯하여 많은 기와조각들이 출토되었다.

분황사(芬皇寺)

대한불교 조계종 제 11교구 불국사의 말사(末寺)로 전불시대 칠처가람터(前佛時代七處伽藍) 중의 하나이다. 선덕여왕 3년(634년)에 용궁(龍宮)의 북쪽에 건립되었다. 창건 10년 뒤에는 중국에서 돌아온 자장법사가 머물렀고, 그 후 원효는 이곳에 머물면서 {화엄경소}, {금광명경소} 등의 수 많은 저술을 남겼다. 원효가 죽은 뒤 아들 설총은 원효의 유해로 소상을 만들어서 이 절에 안치하고 죽을 때까지 공경하고 사모하는 뜻을 다하였는데, 언젠가 설총이 옆에서 절을 하자 소상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고 한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고려시대까지 원효의 소상이 고개를 돌린 채로 남아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밖에도 이 절에는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이 있었고 좌전(左殿) 북쪽벽에 있었던 천수대비(千手大悲) 그림은 영험이 있기로 유명했다. 또한 755년(경덕왕 14년)에는 약사여래입상을 만들어서 이 절에 봉안하였는데 그 무게는 30만 670근 이었고 만든 사람은 신라의 유명한 조각가인 본피부의 강고내말(强古乃末)이었다.

고려시대에는 한문준이 지은 원효의 화쟁국사비가 분황사에 건립되었다. 이 비는 1101년 (숙종6) 8월에 내린 숙종의 조서에 의해 건립되었다. 숙종은 원효와 의상이 동방의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비기와 시호가 없어 그 덕이 크게 드러나지 않음을 애석히 여겨서 원효에게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담당관리로 하여금 연고지에 비석을 세우게 한 것이다. 그 뒤 몽고의 침입과 임진왜란 등으로 이 절은 크게 손상을 입었으며 그 뒤의 자세한 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서는 약사여래입상을 모신 보광전과 승방, 종각 등이 있다. 보유 문화재로는 국보 제30호인 분황사 석탑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인 화쟁국사비편,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9호인 석정(石井) 등이 있다.

이 중 석탑은 원래 9층이었으나, 현재 3층만이 남아 있다. 모전석탑으로서 임진왜란 당시 왜구들이 이 탑을 반쯤 헐었다. 그 뒤 절의 승려들이 탑을 다시 쌓기 위해서 헐었더니 바둑알만한 작은 구슬이 출토되어는데 그 구슬은 수정처럼 빛나고 투명하였으며 태양을 쪼여 솜을 가까이 하면 불길이 일어났으며, 이를 백율사에 보관하였다. 화쟁국사비의 비편은 지금도 가끔 발견이 되고 있는데 비신을 받쳤던 비대는 김정희가 확인하였다. 현재 비대에는 차신라화쟁국사지비적(此新羅和諍國師之碑蹟)이라고 쓴 김정희의 친필이 음각되어 있다.

황룡사지(皇隆寺址)

황륭사지(皇隆寺址), 원광법사가 머물던 사찰로서, 황룡사의 오기로 보기도 하나 왕경에 있던 구황 사찰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다.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계림(鷄林)

사적 제 19호로, 경주시 교동 1번지에 있는 신라 김씨의 시조 탄생지.첨성대와 반월성 사이에 있는 숲으로 경역은 약 7,300㎡이고 느티나무. 물푸레나무. 싸리나무 등의 고목이 무성하다. 처음 시림(始林)이라 하던 것을 김알지(金閼智)탄생의 상서가 있은 뒤로 계림이라 부르고, 마침내는 나라이름까지도 되었다.

《삼국사기》권1 탈해니사금 9년조에는 "봄3월에 왕이 밤에 금성(金城) 서쪽 시림 숲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날이 샐 무렵에 호공을 보내어 보니, 나무가지에 조그만 금궤가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그 사실을 아뢰니, 왕은 사람을 시켜 그 궤를 가져다가 열었더니, 사내아이가 그 속에 들어 있는데, 자태와 용모가 기이하고 점잖았다.

왕은 기뻐하며...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그가 자람에 총명하고도 지략이 많았으므로 알지라 이름을 짓고 그가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씨라 하였다. 시림을 고쳐 계림으로 이름을 바꾸고, 또한 나라이름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있다.

《삼국유사》권1 김알지조에도 65년 3월 김알지의 탄생으로 鷄林으로 바뀌어 부르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 김시습이 이 곳에 와서 남긴 시가 있다. "昔氏가 끝나는 때 태자가 없어 하늘 닭이 금궤에다 상서를 내리었네. 쪼개보니 훌륭한 神兒가 나와서 주기(主器, 종묘의 제기를 맡아 다스리는 맏아들)를 간고(幹蠱)하여 가업이 창성했네."(《매월당집》권12 <遊金鰲錄>, <鷄林>-卽始林也-) 또,《신증동국여지승람》경주부조에도 위의 내용에 이어, "이 숲 속에 쌓은 돌이 있는데 높이가 3척(尺)이나 된다.

속설에 전하기를, '알지(閼智)의 태(胎)를 풀 때에 가위를 놓았던 돌로서 가위의 흔적이 있다.' 한다. 알지의 7대 손(孫) 미추(味鄒)가 조분왕(助賁王)의 왕녀(王女)에게 장가들었더니, 아들이 없어서 미추(味鄒)가 대신하여 섰는데, 이것이 김씨가 나라를 가진 시초였다."는 기록이 있다.

닭이 울면 어두움은 물러가고 새 날이 밝아 오는데, 그 밝은 아침 햇빛에 반짝반짝 빛나는 황금궤의 빛속에서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탄생했다는 것은 신라인의 밝은 꿈과 찬란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현재 이 계림에는 비각이 있으며, 그 안에는 조선 순조 9년인 1803년에 세운 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