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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당 | 능지탑 | 진평왕릉 | 황복사지 삼층석탑 | 보문사지

독서당(讀書堂)

낭산 기슭에 자리한 최치원 선생이 학문하던 서당으로, 정면 4칸, 측면2칸의 팔작 지붕이며 현판은 학사루가 있다. 또한 비각은 토담에 1칸 맞배지붕이며 비문은 '文昌侯 崔先生 讀書堂 遺墟碑 崇禎 紀元後 四庚戌 三月'이라고 되어 있다

능지탑(陵只塔)

경북 경주시 남산에 흐트러져 있던 탑의 재료를 새로 맞추어 놓은 것으로 예로부터 능지탑 또는 연화탑이라 불려왔다고 한다. 원래는 기단 사방에 12지신상을 새긴 돌을 세우고 그 위에 연꽃무늬가 있는 석재를 쌓아올린 5층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은 임종 후 10일 내에 왕궁 밖 뜰에서 검소하게 화장하라고 유언하였는데, 탑 주변에서 문무왕릉비 조각이 발견되고 사천왕사, 선덕여왕릉, 신문왕릉과 이웃한 것으로 보아 문무왕의 화장터로도 추정되고 있다.

진평왕릉(眞平王陵)

경주시 보문동에 위치하고 있다. 경주시 분황사 뒷편의 사거리에서 보문관광단지 방향으로 0.5km정도 이동하면 오른쪽으로 난 길을 만날 수 있다. 도로변에 보문정사와 진평왕릉에 대한 이정표가 보이는데 우회전하여 포장된 농로를 따라 남촌마을로 이동하면 마을 서남쪽 들판 가운데에 왕릉이 수양버들속에 싸여 있다. 사적 제180호이다. 

진평왕의 성은 김씨이며 이름은 白淨이며 眞興王의 장손자이다. 어머니는 만호부인이고, 왕비는 마야부인이다. 579년에 왕이 되어 632년에 죽을 때까지 54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 신라 시조 임금인 혁거세거서간 다음으로 재위기간이 길었으며 여러차례에 걸친 고구려의 침공에 대항하는 한편 수나라와 수교하였고 수나라가 망하자 당나라와 수교하였다.국내적으로는 원광, 담육 등 승려를 중국으로 보내 수도하게 하는 등 불교진흥에 힘썼다.특히, 경주의 남산성을 쌓았고 명활산성을 개축하는 등 왕경방어 대책에도 힘썼다.

한지(漢只)에 장사하였다는 {삼국사기} 기록에 의해 조선시대에 장지를 이곳으로 비정하였다. 조선시대에 이곳에는 한지원(漢只院)이 있기도 하였다. 왕릉의 외부모습은 흙으로 덮은 둥근 봉토분으로서 무덤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사용하여 보호석렬을 갖춘 것으로 여겨지나 지금은 몇개만이 확인되고 있다. 이와같이 자연석을 이용하여 보호석렬을 마련한 예는 삼국기 말기와 통일신라 초기에 보이던 형식이다. 왕릉의 지름은 36.4m, 높이는 7.9m이다.

황복사지 삼층석탑(皇福寺址)

황복사지는 현재 경주시 구황동에 폐사지(廢寺址)만이 남아 있는 사찰이다.

이 곳에서 발견된 <금동사리함명문(金銅舍利函銘文)>의 내용이 신라사 연구에 크게 도움을 준 관계로 관심이 집중된 곳이기도 하다. 이와 함께 황복사는 드물기는 하지만 문헌에도 그 존재를 남기고 있어 신라사 내지 신라불교사 연구에 종종 운위되는 사찰이라고 할 수 있다. 황복사는 사지(寺誌)가 남아 있지 않아 그 연혁을 살피기가 쉬운 사찰은 아니다. 더구나 현재의 사지가 황복사인가에 대한 의문이 있었으나, <皇福>,<王福> 등의 기와편으로 볼 때 크게 의심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생각된다.

황복사에 관한 내용은 <황복사금동사리함명문(皇福寺金銅舍利函銘文)>과 《삼국유사》등에 드물게 나마 그 존재가 확인되고 있다. 황복사 3층석탑 안에서 나온 사리함의 명문은 다음과 같다.

(1)무릇 성인은 가만히 있으면서 혼탁한 세상에서 백성을 기르고, 지극한 덕은 억지로 하지 않으면서 이 세상에서 중생을 제도한다. 신문대왕은 오계(五戒)로써 세상에 응하고 십선(十善)으로 백성을 다스려 ,통치를 안정하고 공을 이루고는 천수 3년(692) 임진년 7월 2일에 돌아가셨다. 신목태후(神睦太后)와 효조대왕(孝照大王)은 받들어 종묘(宗廟)의 신성한 영령을 위해 선원가람(禪院伽藍)에 삼층석탑을 세웠다.

보문사지(劍塚)

보문사지(普門寺址), 경주시 보문도에 있는 폐사지로, 진평왕릉이 곁에 있고 앞쪽으로 황복사지가 있으며 낭산이 평쳐져 있다. 현재 이 곳에는 금당지,탑지 등의 유구가 남아 있고, 당간지주, 연화문 당간지주, 석등지대석,석조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일제시대에 조사된 바에 따르면 이 곳에서 발견된 명문기와에 '보문(普門)'이라고 새겨진 것이 있어 이후 이 곳을 보문사지로 명명한 것이다. <황룡사9층목탑찰주본기>에 의하면 보문사 상좌 승 은전이 도감전의 직책으로 대탑불사에 참여한 기록이 있다. 871년의 일이므로 이 때까지 보문사는 경주의 한 대찰로 존재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재는 완전히 폐사지로 되어 있을 뿐 아니라 제대로 보존도 되고 있지 않은 형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