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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대왕릉 | 이견대 | 감은사지 | 석탈해왕 탄강유허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해변에서 약 200미터 떨어진 바다에 있는 신라 제30대 문무왕의 수중릉으로 사적 제 158호이며 대왕암으로도 불리고 있다. 문무왕은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내어 삼국통일을 완수한 영주이다. 위대한 업적을 남겼던 문무왕이 재위 21년만인 681년에 죽자 유언에 따라 동해구에 장사를 지냈다. 그의 유언은 불교의 법식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에 묻으면 용이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창고문 밖의 정원](庫門外庭)에서 화장한 유골을 동해의 입구에 있는 큰 바위에 장사지냈으므로 그뒤 이 바위를 대왕암 또는 대왕바위로 부르게 되었다.

수중릉은 해변에서 가까운 바다 가운데 있는 그다지 크지 않는 자연바위이다. 그 남쪽으로 보다 작은 바위가 이어져 있으며, 그 둘레로 썰물일 때만 보이는 작은 바위들이 간격을 두고 배치되어 있어 마치 호석처럼 보이고 있다. 대왕암애 올라보면 마치 동서남북 사방으로 바닷물이 나오고 들어가는 수로를 마련한 것처럼 보인다.

특히 동쪽으로 나있는 수로는 파도를 따라 들어오는 바닷물이 외부에 부딪쳐 수로를 따라 들어오고 나감으로써, 큰 파도가 쳐도 안쪽의 공간에는 바다 수면이 항상 잔잔하게 유지되게 되어 있다.내부의 공간은 비교적 넓은 수면이 차지하고 있고 그 가운데에는 남북으로 길게 놓인 넓적하고도 큰 돌이 놓여 있는데, 수면은 이 돌을 약간 덮을 정도로 유지되고 있다.

따라서 문무왕의 유골을 이 돌 밑에 어떤 장치를 해서 장골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그러나 수중발굴조사가 실시되지 않아 판석처럼 생긴 돌 밑에는 어떠한 시설이 마련되어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사방으로 마련된 수로와 아울러 안쪽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하여 바위를 인위적으로 파낸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기록에 나타난 것처럼 문무왕의 수중릉일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더구나 바위의 안쪽에 마련된 공간에 사방으로 수로를 마련하고 있는 것은 부처의 사리를 보관한 탑의 형식에 비유되고 있다. 즉 내부로 들어갈 수 있도록 사방에 문이 마련되어 있는 인도의 산치탑의 경우나 백제 무왕때 만들어졌다고 알려진 익산 미륵사 석탑 하부의 사방에 통로를 마련한 것과 같은 불탑의 형식이 적용되어 사방에 수로를 마련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문무왕의 능은 전대의 왕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예라 할 수 있다.

이견대(利見臺)

이견대(利見臺), 사적 159호로 경주시 감포읍 대본리 661번지에 있는 누각으로, 문무대왕을 추모하기 위하여 해안의 언덕에 축대를 쌓고 해중에 나타났던 용을 보던 곳으로 양북면 용당리 해안의 언덕에서 대왕암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곳이다. 이견대라는 이름은 주역의 "비룡재천 이견대인(飛龍在天 利見大人)"이라는 문구에서 나온 것으로 신문왕이 바다에 나타난 용을 보고 나라에 크게 이익이 있었다는 뜻에서 지은 것으로 풀이된다.1970년 발굴 때 건물지가 확인되어 신라 건물양식을 추정하여 1979년에 복원한 것으로 루에 오르면 대왕암이 한 눈에 들어오는 전경을 가지고 있다.

감은사지(感恩寺址)

감은사는 신문왕 원년인 681년에 완공된 호국(護國)과 효도(孝道)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진 신라시대의 고찰이다. 문무왕은 부처님의 위신력을 빌어 왜구를 격퇴시키고자 동해안 가에 사찰을 창건하였으나 완공 전에 승하하셨으므로, 부왕이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키리라는 뜻을 이은 신문왕이 이 사찰을 완공하고 감은사라 명명하였다. 이 때 신문왕은 금당 아래에 용혈(龍穴)을 파서 용으로 화한 문무왕이 불경소리를 듣고 싶으면 늘 해류를 타고 출입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하였는데, 이는 왜구의 침입에 따른 첩보용으로도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감은사는 사찰의 보호와 보존을 위해 감은사성전(感恩寺成典)이 설치되어 있었다.《삼국사기》권38 직관지 상에 의하면 감은사성전은 경덕왕 때에 수영감은사사원(修營感恩寺使院)으로 고쳤다가 뒤에 이전 명칭으로 회복시켰다는 것으로 볼 때, 7세기 말 8세기 초에 이 성전이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감은사성전은 다른 사찰의 성전과 마찬가지로 왕실의 발원에 의하여 창건된 원찰로서,

사원의 조영과 수리 뿐만 아니라 왕실의 제사를 받드는 봉사(奉祀) 기관으로서의 기능도 하고 있었다. 신라 하대에 이르러서도 신라 왕들은 감은사에 거동하여 바다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권9 혜공왕 12년 1월조와 권11 경문왕 4년 2월조에 나오고 있어 이를 입증하고 있다.

감은사성전의 소속관원으로는 최고 관직의 금하신(衿荷臣)이 한 사람으로 경덕왕 때에 검교사(檢校使)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에 다시 금하신이라 하였고 애장왕 때에 令으로 고쳤다. 상당(上堂)도 한 사람으로 경덕왕 때에 부사(副使)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에 다시 상당이라 하였고 애장왕 때에 卿으로 고쳤다(혹은 경을 없애고 적위를 두었다고도 한다). 적위(赤位)는 한 사람으로 경덕왕 때에 판관(判官)으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적위라 하였다. 청위(靑位) 역시 한 사람인데 경덕왕 때에 록사(錄使)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청위라 하였다. 말단의 사(史)는 두 사람으로 경덕왕 때에 전(典)으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사라 하였다.

석탈해왕 탄강유허(昔脫解王誕降遺墟)

신라 제4대 탈해왕(재위 AD 57∼80)이 탄생한 곳이다. 신라의 3대 왕성인 박·석·김 가운데 최초의 석씨 왕인 탈해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고 있다. 왜국에서 동북쪽으로 1천여리 떨어져 있는 다파나국 왕비가 임신 7년만에 큰 알을 낳았는데, 이는 좋지 못한 일이라 하여 그 알을 보물과 함께 궤속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그 궤가 신라 땅에 와 닿았을 때 한 늙은 여자가 발견하여 열어보니 어린아이가 있어 데려가 길렀다. 궤가 바다에 떠내려올 때 까치들이 우짖어서 발견하였으므로 까치 ‘작(鵲)’자에서 '조(鳥)’자를 떼어내어 '석(昔)'으로 성을 삼고, 또한 궤를 풀고 나왔다 하여 이름을 '탈해'라 하였다고 한다. 탈해는 A·D 8년 신라 제2대 임금인 남해왕의 사위가 되었고, AD 57년 유리왕의 뒤를 이어 제4대 임금이 되었다. 태어난 곳은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계림동 하서지촌 아진포'라 되어있는데, 조선 헌종 11년(1845) 그곳에 하마비와 땅을 하사하여 석씨 문중에서 유허비와 비각을 건립하였다